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Galatea

보통 여자, 그냥 사람

 

20대에 나는 온 세상을 다 바꿔놓을 심산이었다. 그럴 수밖에 없었다. 세상이 나의 편이 아니었으므로. 세상은 자꾸만 내가 남자라고, 그러니까 어떤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거짓말을 속삭였다. 나는 그 속삭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다. 무엇이 왜 어떻게 얼마나 문제인지를 말하는 것이 나의 업이 되어 있었다. 그렇게 대학교 생활을 보냈고, 자연스럽게 시민사회단체에 첫 취직을 했다.

 

순조로웠다.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. 나는 여성으로서 신체적 그리고 법적 성별을 정정했고, 내 이름을 내가 지었으며,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. 20대 중후반에 이룬 나름의 성공은 무척 달콤했고 눈부셨다. 하지만 나는 영원히 그렇게 살 수 없었다.

 

나는 어느 곳에 가든 내가 트랜스젠더임을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감에 시달렸다. 돌이켜보면 굳이 안 그래도 되었을 터인데, 이른바 운동 내지는 활동이라는 것을 하던 당시 내 입장으로는 꼭 그래야만 했다. '여성'이 상상하는 '여성'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'여성'에게 이 세상이 어떻게 기울어진 운동장인지를 누군가 말을 해야 했고, 설쳐야 했다.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. 실제로 나는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. 그러나 그래서 행복하진 않았다.

 

오히려 불행했다. 나는 언제나 옳아야 했다. 틀리거나 실수할 자격이 없었다. 난 언제나 착하고 개념있고 영리해야 했다. 난 그걸 어느 순간부터 견딜 수 없게 되었다. 나는 속과 바깥이 똑같은 빨간 토마토여야만 했다.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올바른, 온당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. 그런 상황에 내가 나를 밀어넣었다. 나에게도 배우지 못 한 순간, 앎에도 어디로부턴가 엇나간 순간,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참담한 순간이 있다. 나는 누가 뭐래도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.

 

자유롭게 살고 싶었다. 목숨 걸고 쟁취한 여성으로서의 삶, 나 자신으로서의 삶은 자유로워야 했다. 그래서 난 처음으로 퇴사를 했고, 20대를 다 쏟은 일에서 손을 떼었다. 그 때부터야 나는 비로소 보통 여자, 그냥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다. 난 가끔씩 집에서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면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상상을 해, 라는 말을 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삶을 얻어냈다.

 

그래서 나는 지금 백조였다가 회사웠이었다가 다시 백조가 된 내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. 사는 방법을 바꾸는 데에는 그 만큼 품이 드는 법이다. 마의 서른을 이기지 못하고 빡빡 밀어버렸던 내 머리카락이 다시 허리에 닿을 때 즈음엔 과거보다,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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